古朝鮮 (朝鮮歷史 韓長庚)

2023-10-27 20:10
文章标签 古朝鮮 朝鮮 韓長

本文主要是介绍古朝鮮 (朝鮮歷史 韓長庚),希望对大家解决编程问题提供一定的参考价值,需要的开发者们随着小编来一起学习吧!

 

 

고조선(古朝鮮)

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하나 확실(確實)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그 후(後)에 중국(中國)의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는데, 은(殷)나라의 왕자(王子)인 기자(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지금(只今)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부여(扶餘), 남부(南部)에는 구려맥(句麗貊)이 있고 반도방면(半島方面)에는 한(韓)이 있었는데 그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는 알 수 없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여러모로 발달(發達)된 산업(産業)의 기초(基礎) 위에서 대륙(大陸)의 진보(進步)한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여 크게 발전(發展)하고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발달(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中國)의 제(齊)와 노(魯)로 더불어 무역(貿易)하며 농사(農事)짓는 법(法)과 우마(牛馬)를 기르는 목축업(牧畜業)이 발달(發達)하고 사람의 성질(性質)이 정직(正直)과 예절(禮節)과 신의(信義)를 숭상(崇尙)하고 평화(平和)와 정결(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사람들은 아국인(我國人)을 군자지국(君子之國) 대인지시(大人之市)라하고 인인선(仁人善)이라 불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이 구백여년(九百餘年)동안 계속(繼續)하는 중(中)에 중국(中國)에서는 주(周)나라 세력(勢力)이 차츰 약(弱)해지고 소위(所謂)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時代)라 해서 여러 백년(百年)동안 전쟁(戰爭)이 계속(繼續)되고 흉년(凶年)이 겹들어서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중국(中國) 북방(北方) 사람들이 혹(或)은 해로(海路)로, 혹(或)은 육로(陸路)로 조선(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특(特)히 연(燕)나라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서부(西部)를 쳐서 빼앗고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조선(朝鮮)과 지경(地境)을 접(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교섭(交涉)이 잦았고 주(周)나라가 망(亡)하고 진(秦)나라가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할 무렵에 조선(朝鮮)으로 피난(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수(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기부왕(箕埠王)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서부국경(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만(滿)이 야심(野心)을 품고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난리(亂離)를 일으켜 왕도(王都)를 치거늘 준왕(準王)이 미처 항거(抗拒)치 못하여 해로(海路)로 마한(馬韓)에 주입(走入)하니 이는 단기(檀紀)이천일백사십년(二千一百四十年) 정미(丁未)이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세운 후(後)에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진(秦)나라를 이어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한 한(漢)나라의 세력(勢力)이 커져서 동(東)으로 침입(侵入)하니 위만(衛滿)의 손자(孫子) 우거(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항복(降服)하니 이는 단기(檀紀) 이천이백이십육년(二千二百二十六年) 계유(癸酉)의 일이오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삼대(三代) 팔십칠년(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고지(故地)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四郡)의 위치(位置)와 넓이에 대(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대개(大槪)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동강(大洞江) 기슭임이 확실(確實)하고 진번군(眞番郡)은 황해도(黃海道)와 경기도(京畿道)의 한강(漢江) 이북(以北)이오 임둔군(臨屯郡)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와 강원도(江原道)의 철령(鐵嶺) 이북(以北)이오 현토군(玄菟郡)은 압록강(鴨綠江) 기슭을 중심(中心)으로 한 평안북도(平安北道)와 동가강(佟佳江) 하류지방(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사군(四郡)은 우리 민족(民族)의 맹렬(猛烈)한 반항(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이군(二郡)은 이십육년(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현토군(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해소(解消)되고 낙랑군(樂浪郡)만이 중국(中國) 사람들의 근거지(根據地)로서 반도(半島) 중부(中部)에 사백여년(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아국(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중국(中國)과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함으로 아국(我國)의 중국(中國) 무역(貿易)을 맡아 하였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에 분명(分明)한 토성(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전토(田土)사이에서 낙랑군(樂浪郡)의 유물(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낙랑(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동(東)쪽 평평(平平)한 언덕 위에 수다(數多)한 고분(古墳)이 있고 그 고분(古墳) 속에서 금(金) 옥(玉) 동(銅)으로 만든 거울과 각종(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와편(瓦片) 칠기(漆器) 등(等) 낙랑유물(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고고학상(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조선(朝鮮) 중부(中部)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건국(建國)될 무렵에 지금(只今)의 북만주(北滿洲) 지방(地方)에는 부여족(扶餘族)이 살아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에 힘쓰고 중국(中國)의 진보(進步)된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하였으며 지 방(地 方)이 이천리(二千里)이오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나되며 서(西)로 오환(烏桓) 선고(鮮皐) 등(等)의 인(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과실(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혹(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혹(或)은 죽여야한다 하였다. 부여(扶餘)의 임금은 세습적(世襲的) 추장(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오(烏), 가(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等) 벼슬이 있어 소도(所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각기(各其) 수백호(數百戶)로부터 수천호(數千戶)의 백성(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여(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동해(東海) 방면(方面)에는 옥저(沃沮), 예(濊)가 있고 반도(半島) 남부(南部)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 옥저(沃沮)는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동북(東北)이 좁고 서남(西南)이 넓으며 장(長)이 천리(千里)이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으로는 예(濊)와 잇닿아 있었다. 호수(戶數)는 오천(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부락(部落)마다 수령(首領)이 있어 부락(部落)일을 추려나가고 언어(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같고 성질(性質)이 강직(强直)하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생산(生産)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남북(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한 관계(關係)로 여름이면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약탈(掠奪)함으로 산중(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부락(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예(濊)는 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에서 함경도(咸鏡道)의 남(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라 하고 호수(戶數)가 이만(二萬)이며 사람들이 성질(性質)이 순후(淳厚)하고 염치(廉恥)가 밝으며 도적(盜賊)이 없어서 밤에 문(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의복(衣服)은 다르며 여러 부락(部落)은 산천(山川)의 경계(境界)를 중(重)히 여겨 서로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범(犯)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奴隸)와 우마(牛馬)로써 배상(賠償)하며 기(忌)하는 것이 많아서 가족중(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예(濊)사람들은 마포(麻布)를 짜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농사(農事)의 풍흉(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이 시대(時代)는 일산(一山)의 장(障)과 일수(一水)의 조(阻)가 스스로 한 부락(部落)을 이루어 국가(國家)노릇을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지방(地方)에 이러한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칠십팔국(七十八國)이나 있었다. 각(各) 부락(部落)에는 수령(首領)이 있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각기(各其) 소속(所屬)한 부락국가(部落國家)를 통어(統御)하는 총왕(總王)이 있었다.

마한(馬韓)은 그 중(中) 서(西)쪽에 있어서 백성(百姓)이 농사(農事)를 짓고 양잠(養蠶)을하고 오십사국(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대국(大國)은 만여호(萬餘戶), 소국(小國)은 수백호(數百戶)이며 사람의 성질(性質)이 용감(勇敢)하고 해마다 오월(五月)에 파종(播種)이 끝난 뒤와 시월(十月)에 추수(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전국인(全國人)이 모여 천제사(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일야(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변(弁),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땅에서 모두 이십사국(二十四國)이 있고 대국(大國)은 사오천호(四五千戶)이오 소국(小國)은 육칠(六七)백호(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양잠(養蠶)과 우마(牛馬)의 축산(畜産)이 성(盛)하고 혼인(婚姻)에 예절(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조우(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영혼(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삼한(三韓)을 나눠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하고 그 중(中) 마한(馬韓)이 지금(只今)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에서부터 충남북도(忠南北道)와 전라도(全羅道)땅이고 진한(辰韓)은 지금(只今)의 경상도(慶尙道)의 대부분(大部分)이고 변한(弁韓)은 나중의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지방(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硏究)에 의(依)하면 진한(辰韓)이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漢江) 유역(流域)이고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이고 변한(弁韓)이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이라 한다.

부여(扶餘)의 일족(一族)에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의 땅이오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이다.

이 시대(時代)의 정치(政治)는 신앙(信仰)과 완전(完全)히 분립(分立)되지 아니하여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정치(政治)를 행(行)하였다. 신앙(信仰)의 가장 높은 대상(對象)은 하늘의 상징(象徵)인 태양(太陽)이었으며 해마다 농사(農事)가 끝나면 일정(一定)한 때에 신곡(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등(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제사(祭祀)는 처음에 높은 산(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태양(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風習)은 나중에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되고 강안(江岸)과 평야(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계속(繼續)되어 국가(國家)에서는 해마다 유명(有名)한 높은 산(山)에 산제(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정성(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사회(社會)는 대가(大家)라는 지배계급(支配階級)과 하호(下戶)라는 백성(百姓)과 노예(奴隸)의 세 계급(階級)으로 나뉘었고 대가(大家)들은 광대(廣大)한 토지(土地)를 가지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농사(農事)를 지었으며 이 시대(時代)는 토지(土地)는 넓고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함으로 전쟁(戰爭)할 때마다 노예(奴隸)로 부릴 포로(捕虜)를 얻는 것이 유일(唯一)한 전리품(戰利品)이었다. 산업(産業)은 농잠(農蠶)과 직포(織布)가 자못 발달(發達)하였으며 변 진한(弁辰韓)에서는 철(鐵)을 채굴(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무역(貿易)하였다.

종전(從前)에는 석기(石器)와 동기(銅器)만 있었는데 동기(銅器)는 연(軟)하여 칼 도끼 등(等)으로 사용(使用)치 못하더니 철(鐵)이 발견(發見)된 후(後)로 철제(鐵製)연장과 무기(武器)가 생겨서 산업(産業)과 전쟁(戰爭)양식(樣式)에 대혁명(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문명(文明)에서 철(鐵) 한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호화(豪華)스러운 문명(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고대(古代)의 철(鐵)의 발견(發見)은 참으로 경이적(驚異的) 사실(事實)이었다.

 

요즘 트위터 페이스북 더보기
싸이월드 미투데이

这篇关于古朝鮮 (朝鮮歷史 韓長庚)的文章就介绍到这儿,希望我们推荐的文章对编程师们有所帮助!



http://www.chinasem.cn/article/288083

相关文章

儒敎와 佛敎의 文化 (朝鮮歷史 韓長庚)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 고려(高麗) 건국(建國) 이후(以後)에 유교(儒敎)가 들어와서 관가(官家)에서 세운 교육기관(敎育機關)에 의(依)하여 상당(相當)한 발달(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관학(官學)외(外)에 사학(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학생(學生)들은 관학(官學)보다도 사학(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正易判讀 6-1 韓長庚 著

正易判讀 6-1 한장경 저     002                         正易 十五一言 十五者 正易八卦圖之 十乾天五坤地也 先天乾用九坤用六 九者 陽數生長之極而長極則 進爲十 故后天乾十也 六者 陰數收斂之極而收極則 退爲五 故后天坤五也 十干之數 己爲十戊爲五 故乾十在己十之位 坤五在戊五之位也 乾在己位 故己位之乾天生太陽 爲太陽之父 坤在戊位 故

正易判讀 6-2 韓長庚 著

正易判讀 6-2 한장경 저     051 이 反易이 없고 顚倒하여도 變치 아니하니 이것도 또한 氣東北而固守의 象이다 理西南而交通이라 함은 理西南對氣東北而言 東北固守者氣之質也 西南交通者理之作用也 后天九宮圖 中央十五雷風作用於西南 南有二七 西有四九 行金火互位之政也 十五二七者 雷風山澤而亦十紀 二經 五綱 七緯之數 而爲戊己日月之象 故東北之天地日月固守

正易判讀 6-4 韓長庚 著

正易判讀 6-4 한장경 저     150 十一吟 乙酉 癸未 乙未者 未酉也而未酉 后天之后天也 未酉之象 后天之時運也 二十八者 二十八宿運氣圖也 乙酉大明終始之初三日 故大明乙酉 爲歲象也 癸未爲月之始朔 故朔癸未 爲月象也所以言 乙酉歲癸未月也 十一歸體者 皇中月以五六之十一成體也 皇中月成體則 先天之卯戌五八尊空也 先天月之數尊空則 九二錯綜而金火互易也 火居南 金居

高麗의 滅亡 (朝鮮歷史 韓長庚)

고려(高麗)의 멸망(滅亡) 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李朝建國 (朝鮮歷史 韓長庚)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신(壬申) 기묘(己卯) 신사(辛巳) 기해(己亥) 신미(辛未) 계유(癸酉) 7 2 18 32 2 3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병자(丙子)

物質文明의 沒落과 精神文明의 發達 (韓長庚 易學原理總論)

   ■ 物質文明의 沒落과 精神文明의 發達 사람의 生理가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므로 사람의 學問의 傾向도 또한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는 것이다. 萬物의 生生에는 모두 生命과 神의 二元이 있는데, 生命의 運動은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이 生하여 物質이 되고, 神은 無形하여 有形한 物質속에 갈무리하여 있고 사람의 天性 心情等 精神은 形質속에 갈

地球 달 사람의 變化 (韓長庚 易學原理總論)

   ■地球 달 사람의 變化 宇宙의 天體는 그 組織이 陰陽의 二元作用으로 되어 收斂作用과 發散作用이 있으므로 그 生生하는 過程에는 스스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고 하여 收斂하는 時運과 發散하는 時運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太陽系의 宇宙도 時運의 變化가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地球도 不斷히 變化하고 있는 것이다. 地球는 發生하는

未來의 成의 時運 (韓長庚 易學原理總論)

   第五章未來의 成의 時運 第一節 世上의 變化 ■ 先天과 后天의 時運 지금 이 時點은 萬物의 자라고 있는 長의 時運이오, 物의 자라는 者는 반드시 여물어서 成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오는 未來時運은 成의 時運이다. 옛적에 生의 時運으로부터 長의 時運으로 넘어올 때에는 生의 時運을 先天이라 하고 長의 時運을 后天이라 하였는데 지금에는

天命은 一生의 使命 (韓長庚 易學原理總論)

   ■ 天命은 一生의 使命 사람에게는 自由意志가 있어 神의 自然法則을 어기고 惡의 發生하는 일이 있으므로 사람은 그 出生하는 때에 自體의 生生을 營爲함에 必要한 天性을 天으로부터 稟受하는 同時에 또한 世上에 出生하여 어떠한 일을 한다는 使命을 天으로부터 아울러 稟受하니, 이가 天命이오, 乾卦에 「乾道가 變化하여 各各 性命을 正한다」